ㅡ 팔은 둥글고, 다리는 곧게 뻗도록 그려졌지만, 이들에 나타난 근육은 살아있는 형체의 살점에서 그러하듯이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의 중간 쯤에 떠도는 달콤하면서도 시원시원한 우아함이 드러나지 않았다.
ㅡ 오늘날의 예술가들의 공통된 취향은, 그들이 젊을수록 이것과 완전히 반대되는 경향을 보인다는 것이다. 그들은 열정을 대담하게 쏟아내는 자세와 움직임을 뒤틀어 적용하는 법밖에 모른다. 그들은 이것을 정신이 이끈 미술 혹은 프란케짜라고 부른다. 그들이 완벽하다고 밎는미술작품의 본질을 변론하기 위해 선호하는 용어는 콘트라포스토이다. 그들은 형상에서 영혼이 마치 혜성처럼 나타나주기를 기대한다. 모든인물이 아약스이거나 카파네우스이기를 바라는것이다.
ㅡ 양성구유 andorgyny와 자웅동체성에 대한 고대미술사에서의 강조때문에, 편애하는 어린 로마 카스트라토와 쉬고있던 빙켈만을 놀래킨 바 있다는 카사노바의 전언이라든가, 독일 귀족 소년들, 특히나 1763년 예술속 아름다움을 지각할수있는 능력에 대하여라는 에세이를 헌정한 대상이기도 한 프레드리히 폰 베르그 Friedrich von Berg라는 소년을 향한 열병에 대한 빙켈만 자신의 고백은 매우 유용하다.
ㅡ 만약 우리가 물질적인 대상을 묘사하는데 직접적으로 또는 중심적으로 관계하는 용어들에 스스로를 가둔다면 커다란 납작한 패널에사용된 물감들 빨강 노랑 파랑 이미지 등과 같은 개념들에 국한되고 말것이다.. 그림이 실제로 우리에게 주는 그런관심을 찾아내기가 어려울것이다. 정밀성이나 예리함은 중심에서 훨씬 멀리 떨어져 존재하기 때문에 천문학자가 별에서 떨어져 바라보듯이 우리도 사물에서 떨어져서 이야기하고 생각한다.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해 직접적으로 이야기하고 비슷한 영향을 끼치는 다른사물과 비교를 하고 우리에게 그런 영향을 지니는 사물을 제작하는 과정에 대한 추론을 제시하는 이 세가지의 주요한 간적언어 사용방식들은 우리가 그림에 대해 취라는 세가지의 사고방식과 일맥상통한다. 우리는 그림을 단순한 물리적 대상 이상으로 취급한다. 암암리에 우리는 그림을 화가에 의한 제작의 역사를 지닌 무언가로 관람자에 의한 감상 과정의 어떤 실재물로 간주한다.
ㅡ 첫째, 언어의 속성 혹은 일련의 개념화는 묘사가 그림의 재현이라거나 그림을 보는것의 재현이라기보다는 이미 본 그림에 관해 생각하는 과정의 재현이라는것을 말해준다. 다른말로 하자면 우리는 그림과 개념들 사이의 관계를 언급하는 것이다.
ㅡ 둘째 묘사에 등장하는 강력한 용어들의 대부분은 다소 간접적이다. 왜냐하면 이런 용어들은 물질적인 그림 그 자체보다는 그림이 우리에게 미치는 효과나 그에 상응하는 또다른것들, 또는 그림이 그러하듯 우리에게 효과를 미치치는 어떤 사물의 유추된 원인들에 대해 우선적으로 언급하기 때문이다. 마지막 경우는 특히 중요하다. 한편 그러한 과정이 우리의 언어에 매우 깊숙이 침투한다는 것은 인과적인 설명을 완전히 회피할수없으며, 따라서 그에 대해 생각해볼 만하다는 것을 암시한다. 다른 한편 묘사가 설명하는 대상의 한부분이 된다는것이 구도의 개념과 같이 우선적으로 해석적인 요소들을 구체화 한다는 사실에 주의를 기울이고 싶을지도 모른다.
ㅡ 셋째, 묘사는 가장 일반화된 독립적 의미만을 가지고있고 정확성을 위해서는 그림의 현존성에 의존한다. 묘사는 우리가 관심거리를 손으로 가리켜 보여주듯이 지시적으로 작용하며, 예리한 동요를 일으키며 묘사와 특정사항 사이의 상호언급 작용으로부터 의미를 취한다.
ㅡ 선적인 것에서 회화적인 것으로의 발전이다 / 평면에서 깊이로의 발전이다 / 닫힌 형식에서 열린 형으로의 발전이다. / 다양성에서 단일성으로의 발전이다. / 주제의 절대적 명료함과 상대적 명료함이다.
ㅡ 조형미술을 통해 사물을 가장 만족스럽게 재현하려고 하는 인간의 의지와 자신의 욕구에 따라 미술을 해석하려는 인간의 의지 사이에는 분명히 내적 연관성이 존재한다. 이것은 고대의 역사속에서도 도처에 발견된다. 이러한 관계성은 여기서 단지 대략적인 특성으로 언급되지만, 인간의 문화사 전체안에서 차지하는 고대 후기 미술의 중요성을 꾸준히 조사하도록 버팀목이 되어줄것이다.
ㅡ 그러나 모자를 드는 행위가 인사라고 인지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해석의 영역에 속한다. 이러한 형태의 인사는 서양 세계만의 독특한 관습이고, 중세기사 제도의 잔재이다. 무장한 기사들은 투구를 멋어 평화적 의도를 알리고 또 투구를 벗어 이에 답했다. 오스트레일리아의 무시맨이나 고대 그리스인은 모자를 드는 행위가 어떤 부차적인 표현 의미를 지닌 실제 사건일 뿐만 아니라 예절의 기호인지를 인식하지 못할것이다. 신사가 모자를 드는 행위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실제 세계에서 그 대상과 사건에 친숙해야 할 뿐 아니라, 특정한 문명의 고유한 관습과 문화적 전통에도 익숙해야 할것이다. 그러나 나의 지인이 모자를 벗어 인사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면 그가 이행위의 의미를 모르는것이라 할수있다. 그의 행위에 따라오는 부차적 표현 의미들은 그가 의식할수도 있고 의식하지 못할수도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대가 모자를 벗는 그의 행위를 예의바른인사로 해석한다면 나는 이차적 또는 관습적인 의미를 인식한것이다. 이러한 이차적 관습적 의미는 감각이 아니라 지적으로 이해되는 것이고, 실제 행동으로 전달되면서 의식적으로 부과된다는 점에서 일차적 혹은 자연적인 의미와는 다르다.
ㅡ 특정한 미술 작품이 컨텍스트 안에 자리한다는 것은 일련의 재료가 조립되는 것이고 의문시되는 작품과 병치되었을때 그러한 컨텍스트가 작품을 작품으로 만드는 결정인자를 드러내기를 바라는것을 말한다. 기호학적 관점에서 보았을때 이런 절차에서 처음으로 발견되는 것은 경계해야 할만한 것이다. 이것은 컨텍스트를 구성하는 증거가 그 작용의 증거가 되는 시각 텍스트보다 더 간소하거나 명료할것이라고 당연시 할수는 없다는 것이다. 우리의 처음 견해는 컨텍스트와 텍스트 간에 어떤 대립이나 비대칭도 가정하지 않는 것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리고 먼저 한쪽 끝에는 미술작품을 다른 쪽에는 컨텍스트를 둔다. 컨텍스트는 여기서 텍스트가 가진 불확실성에 질서를 만들며 텍스트자체가 확실성 결정성을 향하도록 전이할 준비가 되어있다. 왜냐하면 단순하게 자연적으로 그리고 해석의 기초가 될만큼의 컨텍스트가 주어진다고 가정할수없기 때문이다. 기반 또는 배경으로 자리잡고있는 컨텍스트 개념은 우리를 텍스트의 불확실성으로부터 한걸음 물러나도록 한다. 그러나 일단 한걸음을 물러나면왜 그것을 다시 할수 없는 지가 명확하지 않다. 즉 컨텍스트란 처음부터 제동장치 없는 잠재적인 퇴보를 의미한다.
ㅡ 따라서 작가성은 자연스러운 배경 설명이라기 보다 컨텍스트에 불과하다. 조나단 쿨러를 언급하자면 작가성은 주어진 것이 아니고 만들어 지는 것이다. 작가성의 요인으로 간주되는 것은 해석 전략에 의해 결정된다. 그리고 작가성을 결정한 여러 힘들이 불일치하는 지점에는 작가성이라는 개념이 추구하는 통합성에 문제를 제기하는 일련의 틈들이 목격되며 작가성이라는 개념은 모순을 극복하려고 노력해야만 한다. 자산 / 물리적 대행물 / 작가 / 창조적 주체 / 서사
ㅡ 이러한 경계구분을 관할하는 힘 중에서는 경제학 모형에서 유래하는 것도 있는데 이는 현대적 의미에서 작가성이 역사적으로 소유제도와 유사하게 잘전되어 왔기 때문이다. 여기서 작가성이란 저작권법의 역사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법적 화폐적 작용을한다.
ㅡ 예술가가 예술작품의 근원이되는 것은 예술작품이 예술가의 근원이 되는것과는 비록 다른 방식이긴 하지만 두 사실이 모두 필연적인 것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또다른 방식이긴 하지만 예술이 예술가와 예술작품의 근원이 된다는 사실도 그러한 것들의 사실들만큼이나 확실한 것이다. 그러나 도대체 예술이라는 것이 근원이될수있을까? 예술은 어디에 어떻게 있는 것일까. 예술가란 기껏해야 하나의 공허한 개념으로만 머물뿐 그것에 상응하는 현실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지 않은가? 예술은 우리가 예술에서만 현실적인것 곧 작품들과 예술가들을 위한 장소를 발견하는 집합 관념으로 통할수있다. 비록 우리가 예술이라는 단어를 집합적 개념이상으로 의미화 하더라도 예술이라는 말이 의미하는것은 단지 작품들과 예술가들의 현실성의 기반위에서만 존재할수있다. 그런데 혹시 진상은 그반대가 아닌가? 예술작품들과 예술가들은 오직 예술이 그것들의 근원으로서 존재하기 때문에 있는 것인가?
ㅡ 예상컨대 이것은 쓸데없고 혼란만 일으키는 어리석은 질문일것이다. 왜냐하면 예술자굼은 사물적 측면을 넘어서 그밖으로 나온 무언가 다른것이기 때문이다. 작품안에있는 이 무언가 다른것이 작품의 예술적 본성을 형성한다. 예술작품은 아마 만들어진 사물 angeferigtes Ding, 그러나 단순한 사물 자체와는 약간은 다른것 (사물 Ding)으로 말한다. 즉 그리스어로 표현하자면 allo agoreurei이다. 작품은 다른것을 공개적으로 알린다. 그것은 다른것들을 열리게 한다. 그런점에서 작품은 알레고리이다. allegory. 작품안에서 제작된 사물과 함께 무언가 다른것이 결합되어있다. Anderes . 결합된것은 그리스어로 sumballein이라 한다. 그래서 작품은 심벌이다. symbol.
ㅡ 지금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자굼에 의해서 그리고 작품 가운데에서 무언이 일어나고있는가? 반고흐의 그림은 도구 예컨대 한 켤레의 촌 아낙네의 구두가 진실로 어떻게 존재하고있는가를 개시하고있다. 이를테면 구두라는 존재자가 자신의 존재, 곧 숨어있지 않음 Unverborgenheit 가운데 나타난것이다. 그리스인들은 존재자의 이러한 숨어있지않음을 aletheria라고 불렀다. 오늘날 이단어를 그저 진리라고 부르고있으나 Wahrheit, 이말의 본래적 의미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고있다. 만일 작품가운데서 존재자가 무엇이며, 어떻게 존재하고있는가에 대한 해명이 이루어지고있다면, 이것은 곧 작품에 의해서, 그리고 작품 가운데서 진리가 일어남을 의미한다. Geschehen der Wahrheit.
ㅡ 하이데거는 여전히 이 그림의 중요한 측면을 놓치고있다. 그것은 작품 속에서 예술가의 존재이다. 그림에 대한 설명에서, 하이데거는 반고흐를 위한 주제라고 생각하게 만든 신발에 대해 개인적인 것과 인상학적인것을 간과했다. 반고흐는 농부의 나막신을 묘사할때 같은 테이블위에 배치했던 그릇이나 병 기타등등의 말끔한 정물 오브제처럼 깨끗하고 찢겨지지않은 형태와 표면으로 묘사했다. 이후에 그린 농부의 가죽 슬리퍼 그림에서 그는 관람자에게 신발의 뒷면을 보여준다. 그가 마루에 따로 놓아두고 그린 신발은 마치 우리를 마주 대하고 있는 듯하며 낡은 신발의 사실적인 초상화라고 말할수있을 만큼 외관상 매우 개성있고 오묘하다.
ㅡ 실제 저자는 누구인가 / 우리는 그럼 그의 진본성과 고유성을 증명할수있을까 / 그가 자신의 담론 속에서 자기 자신에 관해 표현한 가장 심오한 것은 무엇인가
ㅡ 대신에 우리는 다음과 같은 다른 질문들을 듣게 될것이다. 이담론의 존재방식들은 무엇인가 ./ 어디서 왔는가 어떻게 순환할수있고 누가 그것을 자기 것으로 삼을수있는가 / 가능한 주체들을 위해 그 속에 마련된 자리들은 어떤 것들인가 / 주체의 다양한 기능들을 수행할수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
ㅡ 그러나 이러한 모든 질문들을 뒤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무관심의 소리를 듣게 될것이다. 누가 말하건 무슨 상관인가.
ㅡ 그리고 대형 글레디에이터 영화 포스터들과 함께 그 술집의 벽에 걸려있다. 벽면에는 이 작품의 정체대 대한 어떠한 설명도없다. 술집 손님들이 서로 꼬리치며 작업거는 장면과 음주가무의 배경으로서 , 그리고 장식으로서 존재할뿐이다. 퀴어 벽지로서.
ㅡ 거대한 미술기관들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아웃사이더 기분을 느끼게 하곤 한다. 그러한 공간안에서 환영받지 못한다는 불편함은 많은 퀴어학자들이 미술사라는 학문에 대해 느끼는 감정과 크게 다르지않다.
ㅡ 우리는 이 문제가 비평가들뿐 아니라 작가들에게 미치는 형향을 과소평가해서는 안된다. 어떤 작품들이 미술관과 갤러리에 걸리고, 저널이나 잡지 신문에 실리는지를 결정하는 경제적 압박과 정치적 압력은 몇몇에게는 단순히 압도적일 뿐 아니라 위협적이기까지 하다. 몇몇에게는 이러한 환경속에서 작업할수있는 방식을 모색하는 것이 단순한 직업적 고민이 아니라 생존의 문제이다.
ㅡ 이집트 대표단은 ㅏ리에서 18일동안 체류한후 국제 오리엔탈리스트 학회에 참석하기 위해 스톡홀름으로 떠났다. 이집트인들은 다른 비 유럽 대표단들과 함께 환대를 받았지만, 대단한 호기심의 대상이기도 했다. 그들은 파리에 머무를때처럼, 자신들이 전시품의 일종임을 발견하게 된다. 그 학회에 참석했던 한 유럽인은 다음과 같이 적었다. 사람들은 진짜 동양인들을 Bona fida Orientals 바넘의 Barnum 올월드쇼에서와 같이 빤히 쳐다보았다. 호기심많은 스칸디나비아 사람들은 그들을 오리엔탈리스트가 아닌 동양인 컬렉션으로 여기는것같았다. 오리엔탈리스트 중 몇몇은 스스로 쇼맨의 역할에 즐거움을 느끼는것같았다.
ㅡ 하지만 문제는 중동을 방문한 사진가나 작가가 동양의 정확한 그림을 만든것이 아니라 동양을 일종의 그림으로 설정했다는 점이다. 그림과 같이 이미 표상적으로 존재하는것을 단지 복사하거나 재현할수는 있다. 다시 말해 문제는 자신과 세계사이의 거리를 창출함으로써 전시장의 사물과 같이 세계를 그림같은것으로 구성했다는 점이다. 이는 대상에서 분리되어 나와 바깥에서 바라보는 입장, 소위 오늘날 우리가 시점이라고 부르는 것을 필요로 했다.
ㅡ 미술관들이 오래된 의례가 행해지는 장소와 닮아있다는 주장은 이들이 가진 구체적 건축양식 때문이 아니라, 이들이 의례를 위한 무대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의례를 위한 장소처럼 미술관 공간도 특별한 주의를 기울이도록 신중히 구분되고 문화적으로 지정된 장소이다. 우리는 미술관에서 일정한 예절에 맞는 행동을 하도록 기대된다. 허쉬혼 미술관의 푯말은 방문객에게 의례적인 활동과 행동거지를 위해서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해서는 안된다는것을 아주 자세하게 알려준다.
ㅡ 미술관에서 의례를 행하는 자는 바로 관객들이다. 순서가 정해져 있는 미술관의 공간과 오브제의 배열들, 그리고 조명과 건축적인 디테일은 무대에 장치와 대본을 담당한다. 물론 모든 미술관이 동일한 정도의 효과를 내는것은 아니다. 이러한 상황은 어떤 면에서는 구도자가 내부에 들어서서 일정한 지점에서 기도를 하고 묵상을 하는 미리 구축되어있는 여정을 따라가는 중세의 성당과 닮아있다. 그리스도의 삶을 재현한 장식물로 치장된 보행로는 구도자가 신성한이야기를 상상으로나마 살아보도록 설정되어있다. 이와 비슷하게 미술관도 치밀하게 고안된 의례적인 시나리오를 제공하는데 예술적인 이야기들이 공간의 순서에 따라 드러나는 형식을 갖추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심지어는 방문객이 미술관에 들어가 자신이 선택한 특정작품만을 보는 경우마저도 미술관의 거시적인 내러티브의 구조는 하나의 틀로서 각각의 작품에 의미를 부여한다.
ㅡ손꼽아 기다렸던 개관시간이 되었고 나의 경외심은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더 큰것이었다. 살롱은 그 자체만으로도 흥분되는 곳이었고, 수려하였으며 잘보존되어있었다. 새로 금박을 입힌 문틀에 나무에 새겨진 세공들은 기름칠이 잘 되어있었다. 심오한 침묵이 내려앉은 공기는 독특하면서도 엄숙함을 자아냈는데 성전에 들어서는 듯한 감정과 무척 비슷했다. 전시되어 있는 장식품들을 관람해 나감에따라 그장식품들을 소장했었던 사원만큼이나 그 장소 역시 예술품을 성스러움의 극치에 다다르도록 축성한 듯한 느낌이 짙어져갔다.
ㅡ 아무리 완벽한 복제라 할지라도 한가지는 결여되어있기 마련이다. 예술작품의 지금, now 여기, here 이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일회성만이 작품이 주체의 역할을 해 온 역사의 흔적을 가리킨다. 이 역사는 자굼의 물리적 구조가 변화해온 양상과 소유권 상의 변화를 함께 내포한다. 전자를 추적하는 일은 화학적이거나 물리적인 분석들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한편으로 소유권의 변화는 전통적 영역에 속하는 것으로서, 현재 위치에서 원본을 염두에 둠으로써만 추적될수있다.
ㅡ 본질적으로 소설과 미술관은 둘다 모든것들이 진실하고 자연스럽고 질제적이며 적합한 질서속에서 함께 어울릴것이라고 보일수있는 파노라마적 관점에 대한 열망을 환기시키고 재연한다. 이러한 마술적 현실은 우리 각자가 실제로 대의적 위치들을 점유할수있다는 특권의식을 환신시키는데, 일상에서나 지배 또는 권력과 대면했을때의 모든증거들은 오히려 이와 반대이다.
ㅡ 새로운 미술은 독창성을 소유한것처럼 보이는 바로 그순간에 역사로서 관찰된다. 이러한 사실은 미술이 현대의 삶과 점차 동떨어져있으며, 전혀 관계가 없다는 인상마저준다. 예술이라는 거대한 풍경안으로 멀어져가는 이것을, 우리는 기차의 정망차 안에서 관창하는 것처럼 바라본다. 몇년안에 새로운것은 전체속에서 단순히 그로테스크 하거나 매혹적인 사건이 되고, 이 전체는 우리가 기차의 차창밖을 바라보듯이 미술관의 유리 진열대 안에서 보게된다. 미술은 유리너머, 역사의 유리 너머에있다.
ㅡ 예술의욕 KUNSTWOLLEN 예술창찾과 관련된 의지나 원동력으로 일반적으로 단체적 국가적 민족적 인종적인 범위속에서 이해될수있다.
ㅡ 숭고 SUBLIME 이용어는 계몽주의 동안 철학적이고 미학적으로 통용되었고 일반적으로 인간의 이해를 넘어선 두렵거나 독특한 특질 혹은 거대함으로 인해 이해를 벗어나 있는 것을 나타낸다. 합리적인 이해와 대조되는 입장에서 숭고는 또다른 18세기의 합리적 대립이나 과잉 페티시즘의 개념과 연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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