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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리포시용의 형태의 삶, 손을 예찬함 _ ravel

애도가 2014. 1. 22. 17:14

 

ㅡ 앙리 포시용의 형태의 삶, 손을 예찬함

ㅡ 사람들이 어떤 우정의 의무를 다하듯이 나는 손에 대한 예찬을 할까 한다. 이글을 쓰기 시작하는 순간, 나는 나의 정신을 자극하고 이끌어가는 내 손들을 바라본다. 그토록 오랜 세월동안 할일을 해온 이 지칠줄 모르는 동무들이 여기있다. 하나는 종이를 제자리에 붙잡아 놓고, 다른 하나는 읜종이위에 검고 활기차며 서두르는 저 작은 기호들을 늘려가고있다. 그들을 통해 인간은 사유의 단단함과 접촉한다. 손은 다음어지지않은 생각의 덩어리를 끄집어 낸다. 손은 그 덩어리에 형태와 윤곽을 갖게 할 뿐아니라, 글쓰기에도 하나의 양식을 부여한다.

ㅡ 손은 거의 생명을 가진 존재에 가깝다. 그것은 하녀일 따름인가?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손은 기운차고 자유로운 천성, 눈도 목소리도 없지만 보고 말하는 얼굴을 타고난 하녀이다. 어떤 맹인들은 아주 섬세해서 트럼프 카드를 만져보기만 해도 거기에 그려진 모양을 이미지의 엄청나게 얇은 두게로도 식별할수있는 촉각을 마침내 획득하게 된다. 그러나 눈이 보이는 사람들도 잘보려면 또는 만지고 잡아보는 것을 통해 외관의 지각을 보와하려면 손이 필요하다. 손의 천품은 그 윤관과 구조속에 새겨져있다. 분석에 정통한 가냘픈 손, 이론가의 길고 불안정한 손가락, 불가사의한 힘을 발산하는 예언자의 손, 아무것도 하지 않을대조차 품위와 표정을 잃지않는 정신적인 손, 부드러운 손 등에서 볼수잇듯이 예전에 그 방면의 대가들이 꾸준히 갈고 닦았던 관상학은 손에 관해서도 한장을 이룰만큼 풍부해졌다.

 

ㅡ 손의 본질은 행동하는데 있다. 그것은 붙잡고 창조하고 때로는 생각하는 듯하가. 손은 탁자위에 내던져있거나 몸을 따라 늘어져 쉴때조차 영혼없는 도구가 아니다. 손안에서 습관, 본능, 그리고 행동의지가 궁리중이므로 손이 어떤 제스처를 보일까 알아 맞히려고 많이 연습할필요는 없다.

ㅡ 위대한 미술가들은 손을 연구하는데 지극히 관심을 보여왔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손에 의존해서 살았기에 손에서 독특한 힘을 느꼈던것읻. 렘블란트는 손이 지닌 온갖종류의 감정, 유형, 나이, 조건을 보여준다. 어떤 대가들은 거의 변함없는 끈기로 모델없이 기억으로 손을 그렸는데 , 이것이 비평에서 분류작업을 하는데 유용한 인체측정 지표가 된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데생이 유일한 것을 포착하기 위한 고심과 분석을 드러내는지! 이런 손들은 저 혼자서도 강렬하게 살아있다.

ㅡ 이 기관은 삶의 탁월한 형태들과 마친가지로 가장 독창적인 기관 가운데 하나이자 가장 분화된 기관 가운데 하나이기에 그런것이다. 섬세한 관절들로 분절된 손목은 수많은 잔뼈로 이루어진 뼏를 갖고있다. 다섯개의 잔뼈가지는 신경, 인대 조직과 더불어 피부아래에서 뻗어가다가 다섯손가락을 내밀기 위해 새순처럼 드러난다. 세개의 관절로 연결된 각각의 손가락은 고유의 을력과 정신을 갖고있다. 가장자리가 둥글고 정맥과 동맥이 돌고있는 불룩한 벌판은 손가락들의 숨겨진 구조를 손목과 이어준다. 그것의 뒷면은 하나의 집합소가 된다.

ㅡ 양손은 수동적으로 동일한 한쌍의 쌍둥이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형과 아우처럼 동등하지 않은 재주를 가진 두 딸처럼 하나는 어떤 기술에나 능숙하고 다른하나는 단조로운 중노동에 종사한 나머지 무감각한 노예와 같이 서로 구별되는 것도 아니다. 나는 오른손의 탁월한 위엄을 전대로 믿지 않는다. 만일 왼손이 없다면 오른손은 힘겨워질것이고, 거의 불모의 고독속으로 빠져들것이다. 왼손, 부당하게도 죽음이나 적 도는 새를 만나지 말아야하는.

 

ㅡ 그러나 인류가 지닌 위퐁당당한 재능은 바로 자연과 별개의 구체적인 세계를 창조할수있다는 것이다. 손이 없는 짐승은 진화의 가장 높은 단계에서 조차 고작 단조로운 솜씨만 보이는 기술의 초입에 머물러있다. 짐승은 마술적인 세계도, 무익한 세계도 만들수없었다. 하지만 그들도 사랑의 춤을 통해 자기네 종의 종교심을 몸짓으로 표현하거나 , 더 나아가 어떤 장례의식같은 것도 어렴풋이 나타낼수는 있었다. 그들은 이미지의 힘으로 흘린거나 이해관계가 없는 형태를 낳을 능력이 없었다.

ㅡ 미술가는 자신의 여러가지모습가운데 하나를 통해 가장 진화된 유형을 대표하는가 하면, 또다른 모습을 통해 선사시대 사람을 계승한다. 그에게 세상은 신선하고 새로운 것이다. 그는 세상을 살펴보면서 문명화된 사람보다 더 날카로운 감각으로 세상을 즐기며, 미지의 것에 대한 경이의 감정을, 그러나 무엇보다도 손의 시학과 기술을 간직하고있다. 정신이 제아무리 대단한 수용력과 창의력을 가졌다해도 손의 협조가 없었다면 어떤 내적 동요에 귀착하고 말았을것이다. 꿈구는 사람은 기괴한 풍경과 완벽하게 아름다운 얼굴이라는 환경을 받아들일수있다. 그렇지만 토대도 실체도 없는 이 환영을 그 무엇으로도 고정시킬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어떤 추억의 추억이 그렇듯이 기억도 단지 그것들을 기록만 할분이다. 현실과 굼을 구별짓는 것은, 꿈꾸는 사람은 어떤 예술도 생산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손은 잠들어있기 때문이다. 예술은 손과 함께 만들어 지는 것이다.

 

 

 

 

 

ㅡ 손은 창조의 도구이기 전에 무엇보다도 인식의 기관이다. 내가 이미 입증했듯이 이러한 사실은 누구에게나 해당하며, 미술가는 말할나위도 없는데, 그가 추구하는 특별한 방식에 따라 그런것이다. 왜냐하면 예술가는 온갖 원초적인 경럼을 다시 시작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는 상토르 처럼 샘과 바람을 유혹한다. 우리는 접촉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데 반하여 , 예술가는 그것을 찾아다니고 체험해본다. 우리는 우리 안에 잠들어있는 아주 오래된 후천적 지식과 어쩌면 진부하고 자동적인 지식에 만족한다. 예술가는 자유로운 대기 속으로 그런 지식을 다시 가져와 새롭게 만든다. 그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어린이도 바로 이와 같지 않은가? 어느정도는 그걱것이다. 그러나 어른은 이런 경험을 중단해보린다. 그는 다 만들어졌기 때문에 더이상 스스로를 만들지 않는다. 미술가는 어린시절의 특권인 호기심을 그시기의 한계를 지나서 까지 연장한다. 그는 만지고 더듬고 무게를 재보고 공간을 측정하고 공기의 유동성을 부각 시켜 그 속에서 미리 형태를 나타내 보이고, 온갖 사물의 거죽을 쓰다듬는다. 그리고 그가 구성할때 쓴 뜨거운 색조, 차가운 색고, 무거운 색조 , 빈약한 색조, 딱딱한선, 부드러운 선과 같은 시각언어는 바로 촉각언어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러나 말의 어휘는 손이 전하는 인상들보다 풍부하지 못하다. 그러므로 그것들의 수효와 다양성과 충만함을 표현하려면 언어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

ㅡ 미술가는 이 우연의 선물을 감사히 받아들여 공손하게 드러낸다. 이 선물은 신이 그에게 보낸 것이며, 그 손의 우연도 신이 보낸것이다. 그는 이 선물을 민첩하게 가로채 거기서 몇가지 새로운 몽상을 피워올린다. 그는 자신의 실수와 손놀림의 결함을 재주부리는데 이용하는 요술쟁이다. 그러나 서툴게 재주를 부릴때부다 더 큰 은총을 얻지는 못할것이다.

ㅡ 돌연성과 구와 능란함의 이 같은 결합을 우리는 위엄을 감지하는 감각을 갖고있고 흔해 빠진 외양에서도 예사롭지 않은 것을 알아보는 재주를 간직했던 대가들의 작품에서 자주 볼수있다. 몽상가들의 가족은 그에 관해 몇가지 예를 보여준다. 우선은 환영이 단번에, 완전히 횡포하게 그들을 사로잡아 거구로 그림을 그리는 저 신들린 화가들처럼 내부에서 뻗어나온 어떤 손에 의해 아무 재료에나 자신의 환영을 있는 그대로 옮긴다고 생각할수있다.

 

ㅡ 내면의 접전 끝에 태어난 이 작품들이 어떤 출발점에 동시에 서있는 것은 아닌가 자문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이런 종류의 정신엔 지표가 필요하다. 미래의 모습을 알려면 찻잔 바닥에 있는 찌꺼기가 남긴 얼룩과 굴곡에서 최초의 윤곽을 찾아내는 점쟁이가 있어야 한다. 돌발성이 물질의 우연성 속에 자신의 형태를 명확하게 표현함에 따라, 손이 이 재난을 활용함에 따라 이제 정신이 개우난다. 혼돈스러운 세계가 이같이 정돈됨으로써 필시 미술에는 부적절한 재료들과 닳고 부서졌으나 오히려 독특한 가능성을 제공하는 즉흥적인 연장 파편 폐기물에서 가장 놀라운 효과가 나타난다. 잉크를 쏟아내는 망가진펜, 큰이 뭉툭해진 나무, 헝클어진 붓은 혼란스러운 세계에서 일하고, 스펀지는 물기를 머금은 여린 빛을 해방시키고, 수채화의 자취가 지면을 별처럼 뒤덮는다. 이러한 연금술은 사람들이 보통 생각하는 것처럼 어떤 내적인 환영을 판에 박듯이 찍어내지 ㅇ낳는다. 그것은 환영을 구성하고 풍경에 육체를 부여하며 환영의 전망을 확대한다. 손은 정신이 시키는 대로 하는 온순한 노예가 아니다. 그것은 정신을 위해 탐구하고 이리저리 궁리하며, 온갖 모험을 거치면서 앞으로 나아가 자신의 운을 시험해본다.

ㅡ 우리가 그 손을 느끼는 것인지, 아니면 손이 자신을 잊어버리게 하려고 전력을 기울이는 것인지 나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손은 거기에 있다. 손은 사지가 만나는 곳에, 얼굴을 표현하는 힘찬 필치속에, 온하늘에 푸르스름하게 드러나는 도시의 윤곽속에, 그리고 빛을 부각시키는 금빛 선영 속에서조차 자신의 존재를 두력이 드러낸다.

ㅡ 나는 몸도 정신도 손과 분리하지 않는다. 그러나 정신과 손의 관계를 지배하는 주인과 유순한 하인의 관계처럼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다. 정신은 손을 만들고, 손은 정신을 만든다. 창조하는 몸짓은 내면생활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친다. 손은 촉각을 그 민감한 수동성에서 구해내 실험과 행동을 위하여 조직한다. 손은 인간에게 면적과 무게와 밀도와 수를 소유하라고 가르친다. 손은 이전에 없던 새로운 우주를 창조함으로써 도처에 그 자국을 남긴다. 손은 자신이 변형시킨 물질, 자신이 변모시킨 형태와 겨룬다. 인간을 가르친 스승인 손은 공간에서, 또 시간에서 인간을 번성케한다.

 

ㅡ 도구와 손, 그러나 이 연구를 계속 끌고 나가는데 기법에 관한 일반적이고 체계적인 관점으로 기법이 하는 역할의 중요성에 정신적 공감을 표하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보다는 기법이 작용하는 방식을 존질적으로 설명해야하고, 용어의 원래 듯에서부터 추적해가며 그것이 살아가는 모습을 관찰해야한다.

ㅡ 손과 도구 사이에는 인간적인 친밀감이 존재한다. 이 둘의 조화는 관습적으로 정의할수없는 극히 섬세한 교환으로 형성된다. 이러한 교환을 통해 우리는 손이 도구에 순응하고 재료속에서 스스로 확장되기를 원하면 도구는 손으로 만들어 진다는 사실을 알게된다. 도구는 기계적이지 않다. 도구의 형태가 이미 활동을 묘사하고 있다 해도 이 미래는 절대적 숙명이 아니다. 만약 그것이 절대적 숙명이라면 아마도 반란이 일어날것이다. 사람들은 못으로 뭔가를 새길수있다. 그런데 못 자체가 어떤 형태를 갖고있으며, 어떤 흥미로운 형태를 제공하기도 한다. 손의 반란이 괴하는 것은 도구를 없애버리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토대위에서 상호 점유를 확립하는것이다. 작용하던것은 제 차례가 되면 작용된다. 이러한 작용과 반작용의 활동을 이해할수잇도록 형태 재료 도구 손을 다로따로 고찰하지 말고 그것들이 만나는 지점, 즉 그것들의 활동이 이루어지는 정확한 위치에 자리를 잡자.

ㅡ 렘블란트 미술의 구성과 파괴. 렘블란트 미술은 이에 관한 아주 좋은 예라고 하겠다. 특히 드라이 포인트 작품에 나타나는 저 선의 중첩은 그것이 깔끔하든지 너덜거리든지 간에 미묘한 빛의 차이와 어둠의 부드러움을 명확하게 지니고있다. 렘브란트는 어떤 대는 다소 자유롭고 다소 열려있어 펜으로 그리듯이 판에 선을 새기고, 도 어떤 때는 불꽃의 소용돌이 모양과 심오한 그림자의 신비속에서 명암의 모든 단계를 추구하며 색칠하듯이 새긴다. 반복되는 인쇄로 약화되어 어렴풋하게 변하다가 마침내 완전히 소멸되는 연약한 구조, 마치 지상에 나타날듯 말듯한 오래된 도시가 그 속에 있는 건물의 설계도를 증명하듯이 층층이 쌓인 작업의 하부 조직만 겨우 간직하고 있는 낡은 판들,

 

 

ㅡ 미술가의 삶. 우리는 앞에서 한 지적에서 두가지 결론을 유추할수있다. 하나는 미술가들의 세속적인 삶과 관련이있고, 다른 하나는 정신적 집단 혹은 정신적 가족과 관련이 있다. 뛰어난 사람들의 활동은 항상 신비스러운 매력과 은밀한 요소를 간직하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늘 그들의 삶의 방식을 속속들이 들여다 보며 그 열쇠를 찾는 것이다. 그들에게 일어난 사건과 일화는 언제나 우리에게 참고자료나 소설의 자료가 될것이다. 우리는 그 것들을 가지고 영웅적인 초상과 진실의 우화를 구성할것이며, 그림자와 먼지로 뒤덮인 배경속에서도 전기라는 보물이 반짝이도록 수고를 아끼지 않을 것이다.